[설악둘레길 개척기]
60년대생 인생 2막 설악산에서 시작되다
글 이정미. 사진(제공) 사단법인 다움숲
[나는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 개척대원 下]
10박11일 180km의 고생길에서 싹튼 동지애, 일반등산산악지도사 자격증 획득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선 개척대원들. 비슷한 연배의 대원들은 열흘 동안 함께 걸으며 동질감과 동지애를 가지게 되었다.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은 나를 춤추게 했다.
설악산에 둘레길 개척의 시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설악산을 찾고, 편리하고 안전하게 숲길을 즐길 수 있길 바랐다. 마음의 평화와 삶의 의욕을 얻을 수 있도록 멋진 둘레길을 만드는 일에 10박11일간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개척대원 18명과 스태프 5명은 속초국립등산학교에서 설렘 가득한 첫 발을 떼었다.
개척대원은 남자 12명, 여자 6명이 4개조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스태프로는 사단법인 다움숲 대표, 개척단장, 개척대장, 트레이너 2명이 참여했다. 설악산 대청봉을 중심축으로 삼아 시계 방향으로 정사각형을 그려 나가는 10일간의 180km 여정이다.
동쪽으로 속초, 양양, 남쪽으로 인제, 하추휴양림, 서쪽으로 한계리, 용대리, 북쪽으로 고성, 소간령, 새이령, 도원리, 국회연수원을 거쳐 국립등산학교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숲길, 논둑길, 임도와 도로, 인도를 걷고 길이 없는 구간은 숲을 헤쳐 가며 걸어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낙오자 한 명 없이 멋지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8시에 숙소를 출발해 오후 5시경 숙소에 도착했다. 2~3일마다 숙소를 옮겨야 했기에 짐을 풀고 싸기를 반복했다.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점심은 주먹밥으로 해결했다. 출발 전 부상 예방을 위해 간단히 체조로 몸을 풀었다. 조별로 돌아가며 스틱을 활용한 폴 체조를 구성했다.
하루에 20km를 걷는 일정을 대원들 모두 즐기며 걸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가파르고 긴 콘크리트 임도길을 평지처럼 걸어가는 대원들, 태생부터 잘 걷도록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짐승이라 부르기도 했다. 걷기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면 조별로 오늘 걸은 길에 대한 소감과 의견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하고 조장회의가 진행되었다. 스태프들과 조장이 모여 조원 의견을 전달하고 하루 활동 보고와 평가, 내일 일정을 협의한 후 다시 조별 회의를 통해 조원들에게 전달하는 시간으로 하루 일정이 모두 끝났다.
일정 초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산행 허가 취소와 출발지와 도착지가 달라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교통 문제, 며칠간 계속되는 점심 주먹밥으로 인한 대원들의 불만이었는데, 조장 회의를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모색해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만족하는 합리적인 방식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국립공원 밖을 걸어야 했기에 부득이 도로를 따르는 구간도 있었다.
일반등산산악지도사 자격증 획득하다
개척 첫째 날, 선두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건 1조 독수리오형제다. 무전기를 든 조장의 얼굴은 비장하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출발한 지 5분이 안 되었는데 여기저기 휴대폰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계획된 경로를 이탈한 것이다. 모든 대원은 멈추었고, 독수리오형제는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살피며 올바른 경로를 찾았다. 단장, 대장, 트레이너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개척대원들이 바른 길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대원 모두에게 등산 지도자급 역량을 길러 주기 위해서였다.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 개척 일정을 완수한 대원에게는 일반등산산악지도사 자격증이 수여된다. 1조는 루트를 수정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등산앱인 산길샘은 요란한 경고음을 냈지만 일정이 거듭될수록 대원들은 차분하게 잘 대처했다.
오전부터 내린 비가 그친 날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모내기를 하기 전 물이 잠긴 논에 비친 하늘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바쁨 속에서 한 줄로 논둑길을 걸어가는 장면을 연출하며 추억에 남을 사진을 찍는 여유로움도 즐기며 우리는 한껏 행복했다. 2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인도와 차도가 구분 안 되는 길을 걸을 때면 스태프들은 늘 긴장했고 “자동차 와요, 한 줄로 가세요”를 연신 외쳤다.
알려지지 않은 화려한 바위계곡에서 환호하는 대원들.
일정 초반 익숙지 않은 환경에 대원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대원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힘든 줄도 모르고 잘 걸었다. 이목리 마을회관을 지나 속초사잇길 제8경 청초천길을 따라 걸었다. 청대마을을 벗어나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평화로운 논밭 주변 경치에 흠뻑 빠졌다. 논둑에 핀 억새풀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 부시게 아름답다 생각하던 차, 어떤 대원은 벌써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봄이 뿜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상복리마을을 벗어나 만난 북궐샘터는 물맛이 매우 좋았다. 이구동성으로 샘물이 맛있다며 물통에 있던 물을 버리고 샘물을 채우느라 분주했다. 임도를 벗어나 숲길로 접어들자 풀향기와 시원한 바람에 마음속까지 시원해졌다.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산길을 걸을 수 있는 시간과 건강이 있음에 감사하며 풀, 꽃, 나무의 이름과 속성을 배워가며 걸었다.
행복했던 고난의 루트 개척
유난히 힘들었던 북암리 루트 개척 끝에 도착한 북암령 평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화원이었다. 얼레지, 피나무, 별꽃을 비롯한 많은 꽃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루트 개척의 수고로움을 어루만져주는 자연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때론 마음의 휴식이 되는 숲길을 만나곤 했다.
앞으로 만들어질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 200’ 코스에 이 구간이 꼭 포함되어 많은 이들이 우리가 느꼈던 야생화의 향연을 공감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4월은 모든 식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갓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어린 잎을 보며 숲해설가 대원들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루트 개척의 첫 번째 고비는 속초의 싸릿재였다. 왼쪽에 청대산, 오른쪽에 주봉산을 낀 임도를 올라 싸릿재로 오른쪽으로 틀어서 올랐다. 고갯마루 갈림길에서 1~2조는 오른쪽 능선 주봉산 정상 루트로 가고, 3~4조는 왼쪽 능선 루트를 개척해 내려와 대포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강릉 경포 화재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새삼 실감하며 또 한 번 겸손해진 시간이었다. 1~2조 루트는 1.5배 정도 길었으나 조망이 좋았고, 3~4조는 호젓하고 조용하지만 희미하게 길이 남아 있어 개척이 힘들지 않았다.
다음날, 임도로 계획되었던 루트 대신 산길을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대부분 흙길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고도가 높은 곳까지 콘크리트 임도가 많았다. 임도를 많이 걷는 둘레길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에 모든 대원이 공감해 산길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잡목을 헤치고 나가는 일, 경사가 매우 심한 사면길을 걸어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자칫 발목에 힘이 풀리면 미끄러질 것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코스는 둘레길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사히 빠져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까스로 임도에 도착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산행과 달리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날 때가 많았는데, 평범한 시골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자연과 한결 가까워지다
다음날 개척 구간은 북암리에서 북암령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해발 500~1,000m에 이르는 오르막길을 헤치며 올라가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위험한 개척 구간은 조별 방식을 포기하고 선두조와 개척조를 별도로 편성했다. 선두조와 개척조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 대장과 선두조의 무선 교신 필수 등의 방침이 결정되었다.
선두조는 지형을 살피며 걷기에 알맞은 길을 찾으며 전진하고, 개척조는 낫을 들고 최소한의 가지를 잘라내며 대원들이 걸을 길을 만들어 나갔다. 바닥만 보고 걷다가 앞사람이 가며 스친 가지가 뒷사람 얼굴을 회초리처럼 내리치는 아픔을 한두 번 당해 본 후에는 시야를 넓게 보며, 앞사람과 거리를 떼어놓고 걷는 지혜를 터득했다.
모처럼 만난 평지 안부에서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의 얼굴에는 힘듦보다 개척대원으로서의 뿌듯함이 가득했다. 정오에 시작된 개척 구간은 15시가 되어서야 북암령에서 끝났다.
월간<산>을 통해 설악산 둘레길 개척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길이 완성되면 동행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걸었던 길 중 몇 구간을 추천해 본다. 전반부가 개척 활동 중심이었다면 후반부는 봄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였다.
첫 번째 추천 코스는 매바위삼거리에서 용대1교, 박달나무쉼터를 지나 소간령, 새이령을 거쳐 도원리에 이르는 구간이다. 박달나무쉼터부터 도원리까지 이르는 숲길로 들어서자 야생화들이 우리를 반겼다. 김O희 트레이너와 함께 걸으며 꽃, 풀, 나무 이름을 물으면 즉각적으로 대답을 들을 수 있어서 신기했다. 홀아비꽃대, 등칡, 족도리풀, 개별꽃, 삿갓나물, 현호색, 사랑초, 금괭이눈, 뱀딸기, 관중, 싱아, 연령초, 미치광이풀, 벌께덩굴, 피나물 등등 내 생애 가장 많은 야생화를 가장 오랜 시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숲해설가 자격증을 가진 대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숲해설가에 도전해 볼 의욕이 생겼다.
새이령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바싹 마른 활엽수 낙엽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지그재그 내리막길이 운치 가득했다. 내리막이 끝나자 갈림길에서 도원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넓고 한적한 길을 걸으며 호젓한 평화를 만끽했다. 연둣빛 잎사귀가 융단처럼 펼쳐진 산자락, 길가의 나무가 더없이 화려했다. 모든 대원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가장 멋진 코스지만 15km의 거리가 일반인이 걷기에 다소 길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잠깐 휴식하는 대원들.
두 번째 추천 코스는 하추휴양림에서 덕적리, 덕적교를 지나 한계리에 이르는 구간이다. 전반부는 포장되지 않은 넓은 임도를 걷는 구간으로 마치 운탄고도 길과 느낌이 비슷했고 인제 천리길과 중복되는 구간도 있었다. 넓으면서 구불구불한 산길, 자작나무 숲, 한석산 고갯마루의 바람과 시원한 조망,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가진 시름을 싹 거두어가는 기분이었다.
세 번째 추천 코스는 한계리에서 만해마을을 지나 매바위삼거리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로를 걷는 구간이 꼭 포함되어야 하나?’하는 의구심을 갖고 출발했지만 불만이 곧 만족으로 바뀐 구간이다. 도로임에도 차량 통행이 적어서 좋았고, 도로 옆을 흐르는 개천, 만해마을, 도로 옆 마을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날마다 산 속을 걷는 일정이라 점심은 주먹밥으로 해결했는데 백담사 진입로 입구에서 짜장면과 짬뽕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마을 밭에도, 가로수도, 마가목이 심겨져 있었다. 봄에는 흰색 꽃이 피고 빨간 열매가 매우 인상적인 마가목은 산촌마을의 주 수익원임을 알게 되었다. 길을 걷는 외지인들로 인해 마가목이 훼손되는 일이 없길 바랐다.
인생 2막, 긍정적인 변화의 물결
2개월 전만 해도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함께 7일간 사전 교육을 받고, 10일을 함께 걸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마냥 가까워졌다. 1960년생부터 1967년생까지 직장을 퇴직한 시니어들이었다.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생활전선에서 한 발 물러나 인생 2막을 펼치는 공감대와 동지 의식을 느꼈다.
우리가 걷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첫날 저녁부터 공책과 볼펜을 받았다. 생활일기를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하루 일과를 기록하고 잠자리에 드는 대원도 있었으나, 기록은 각자의 결정에 맡겨졌다. 날마다 기록하려고 애썼으나 빡빡한 일정에 피곤해, 기록보다는 대원들 간 우애를 나누는 시간이 더 행복했기에 기록이 쉽지는 않았다.
계곡 사이의 바위에 기대어 명상하기, 걸으면서 보았던 인상 깊은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스스로에게 보내는 상장과 편지 쓰기 등 인생 2막의 방향을 설정해 보는 활동은 모두 낯설었지만 진지하게 참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남은 인생은 더 멋지게 펼쳐질 것이라는 확신이들었다.
열흘간 매일 15km 이상 이어지는 강행군이었지만, 테이핑을 하고 서로 응원하며 낙오자 한 명 없이 완주했다.
술 마시고 귀가해 술 한 잔 더하자는 남편의 성화가 귀찮다는 대원에게 술을 무척 좋아하는 대원이 들려준 조언, 가족의 사업 실패와 극복 사례, 30대에 이혼해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자식을 키워낸 대원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며 우리는 서로 위로 받았다. 어느새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이 60에 고민을 나누고 취미 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멋진 동지들이 생겨서 엄청 기뻤다.
매바위삼거리에서 출발하는 날은 숙소에서 농어촌 버스로 이동했다. 5~6명의 손님을 태우고 도착한 버스는 우리가 타자 좌석이 꽉 찼다. 서서 가는 대원들도 10여 명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버스 안이 승객으로 꽉 찬 걸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무척 흐뭇해했다. 우리를 궁금해 하는 아주머니들에게 행선지와 방문 목적, 일정을 이야기하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균형 있게 발전되기를 희망해 본다.
나는 200km에 이르는 설악산 둘레길을 걸으며 지난 내 삶을 돌아보고 인생 2막의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을 갖고자 이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나의 인생 1막은 낯선 상황 속에서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겉도는 경우가 많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물어보고 해결한다’가 아니라 ‘나 혼자 고민하고 찾아내어 해결한다’는 자세로 살았다. 내 예상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거나 거절당할까 두려워 시도하지도 못한 일이 무수히 많았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힘들더라도 적극적으로 다가가 보자는 각오로 10일을 보냈다. 그 결과 버스 안에서 낯선 이와 부담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즐거움을 누리는 나로 변했다. 변화의 작은 일렁임이 큰 출렁임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내 삶을 더욱 값지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월간산 2023년 6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