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내륙종단트레일]
관절염·족저근막염 있는 내가 170km를 걸었다
유영희
임도의 재발견… 태백에서 청송까지 걷기길 연결하기
어린이와 청소년 대원도 참가했다.
“렛츠!” 단장님이 외치면 우리의 구호는 언제나 하나다. “가자!”
폭염에, 땡볕에, 폭우에 유실된 길에, 칡넝쿨이 무릎까지 뻗어도 대원들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부내륙종단트레일, 강원도 고성군 운봉산부터 부산 다대포를 잇는 총길이 700km의 길이다. 사단법인 다음숲(대표 민병순)과 박승기 개척단장, 그리고 개척대원들 모두가 꿈꾸는 걷기길이다. 현재 3기에 걸쳐 경북 안동시 계명산휴양림까지 32박 동안 440km를 완주했다.
12일 동안 17명의 대원이 걷기길 개척에 동참했다. 기존에 있던 임도를 연결하는 개념이다.
대원들 평균 나이 62세
지난 8월 15일부터 시작한 이번 3기 구간은 태백-청송으로 대표와 단장, 트레일러, 초중등생 포함 대원 17명까지 총 21명이 참여한 11박12일 170km의 고되었지만 즐거운 여정이었다. 일반 대원의 평균 나이 62세.
각자의 인생에서 치열하게 살아 온 은퇴자들이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모였다. 처음 만나는 대원들의 낯선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 줄줄 아는 대원들의 모습을 보고 인생을 제대로 살아오신 분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트레일을 통해 나는 길을 이어가는 지식뿐 아니라 사람을 이어가는 지혜도 함께 배웠다. 길을 잇는다는 건 곧 사람을 잇는다는 것이 아닌지.
“오늘은 개척 구간 포함입니다.”
산을 좋아하고 숲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산길 개척은 힘든 일이다. 이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어지간한 일들은 척척 해내지만 여름 끝자락 진해진 초록 숲에서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있는 길은 연결하고 없는 구간은 개척해 가며 태백산 천제단에서 시작해 소천면을 지나 황우산, 청송 아가산으로 길을 이어 나갔다.
더위는 각오했지만 땀에 절은 옷에서 청국장 냄새가 날 줄이야. 땡볕의 포장된 마을길은 그늘을 찾는 우리의 걸음을 이리저리 갈지자로 만들었고, 폭우에 유실된 길은 저 멀리 바라보기만 했다. 때로는 물이 흐르는 계곡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날파리 때문에 탈춤을 추어 본 일이 있는가? 사람이 다니지 않은 옛길은 쌓인 낙엽에 미끄러지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코재’란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코를 박고 올라가는 오르막길이라고. 저녁 식사 시간에 단장님이 말했다.
“날씨도 안 좋고 너무 악조건인데 언제든 중단해도 좋습니다.”
대원들이 하나같이 외쳤다.
“무슨 중단입니까? 종단합시다. 이대로 쭉 다대포까지 갑시다.”
무서운 사람들이다. 걷는 데 이보다 진심일 수 있을까? 폭염의 땀은 카드로 긁어내고 가시덤불은 낫으로 헤쳐 내며 지쳐 쓰러질 지경이면 길에서든 어디든 잠시 쉬었다 걸었다. 아니 그 짧은 쉬는 시간에도 숲 해설사 대원의 강의는 이어졌다.
힘든 일만 있던 건 아니다. 산골 물굽이길, 원시비경길, 임도길, 마을길. 다양한 길을 걸으며 매일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났다. 집 화장실을 선뜻 내어 주는가 하면 경로당에서 쉬었다 가라고 해주시는 따뜻한 인심도 만났다. 이런 뜻밖의 일들은 우리를 더욱 힘나게 하고 스스로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강원도 태백에서 경북 청송까지 잊혀진 임도를 걸었다.
길 냄새를 맡으며 가다 보면 멋진 낙동강 비경을 만나 더위도 잊은 채 잠시 서서 감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이 이렇게 많았다니. 밥 먹을 곳도 마땅치 않아 길 한 켠에서 먹는 점심이지만 함께 온 오이냉국에 감사, 감탄 연발이다. 오이냉국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던가.
어린 대원 둘은 생각보다 훨씬 잘 걷고 의젓했다. 서로 챙겨가며 끝까지 걸어 내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이미 훌륭한 개척대원이다. 피곤에 지친 저녁 시간이면 아이들은 아이돌이 되어 대원들의 활력소가 돼 주기도 했다. 트레일러 박O수 샘이 그랬다. 뜨거운 햇볕에 곡식만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익었다고. 이제 우리는 웬만한 불편함쯤은 참아낼 줄 알고 일상의 작은 것에 더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길을 만든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 길은 아이들을 부쩍 성장하게 했고 어른들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다.
심장을 뛰게 한 ‘개척’ 이란 두 글자
나는 사실 걷기에 매우 부실한 몸이다. 조금만 걸어도 재발하는 족저근막염과 이미 관절염 판정을 받은 무릎 통증, 그리고 여름에 더 괴로운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땡볕에 오래 걷거나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하고 싶었다. ‘개척’이라는 말은 내 심장을 뛰게 했다. 길을 만든다니 너무 멋진 일이 아닌가! 비록 내가 걷는 길이 지금은 지도에 나타나는 한 줄 선이겠지만 언젠가 또 다른 사람들을 나서게 하는 멋진 길이 될 테니까. 그래서 출발 전에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근막을 튼튼하게 해준다는 약도 지어 먹었다.
햇빛 알레르기 연고와 약도 미리 처방받았다. 테이핑한 무릎 위에 무릎 보호대를 하고, 그러고도 아파 오면 바지 위로 한 번 더 보호대를 둘렀다. 폭염의 날씨, 마스크와 모자, 양산으로 최대한 가리고 길을 나섰다.
저녁에는 발바닥 마사지를 하면서 ‘고맙다, 애썼다’하며 조금만 더 버텨 주기를 기도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 잘 걸었다. 걸으면서 치유가 된 느낌이다. 싱그러움 가득한 초록 능선에서 비탈을 돌아 마을로 내려오며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얼마나 넘어지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녀 지금 같은 길이 만들어졌을까?
버텨준 발에게 저녁마다 ‘고맙다’ 인사
힘들게 덤불을 빠져나오다 뒤돌아 봤을 때 생긴 가느다란 길의 모습을 보며 또 이 길을 따라 걸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나는 지금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뿌듯함이 올라오는 순간이다. 전에는 생각지 않던 일이다. 길은 그저 길일 뿐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길은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길은 먼저 지나간 이의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설레고,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해냈다. ‘혼자’라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이었지만 ‘함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대원들은 서로 도와주고 격려하고 응원하며 끝까지 함께했다. 언젠가 이 길을 다시 걸을 때 우리가 매어 놓은 중부내륙종단트레일 노란 리본을 본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이어 낸 멋진 길이니까. 그리고 2023년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서 나를 불태우고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잊지 못할 길이니까.
테이핑을 하고 파스를 붙이면서도, 끝내 완주했다.
그렇게 도착한 청송의 하늘은 참 맑았다. 너무 희귀해서 보기만 해도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무지개구름이 우리의 마지막을 축하하고 응원해 주는 듯했다.
중부내륙트레일 개척단 활동을 마치고 오랜만에 동네 산을 갔다. 해발 몇 미터랄 것도 없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혼자서, 여럿이서, 어떤 이는 맨발로 걷기도 하고 산길에 활력이 넘쳤다. 길을 길답게 만드는 것은 역시 사람이구나!
10여 년 전 혼자서 걷다가 멈추었던 지리산둘레길이 생각났다. 그 길을 마저 걸어야겠다. 아마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훨씬 더 감사한 마음으로 걸을 것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더니, 밴드에 박승기 단장의 글이 올라왔다.
‘다대포까지 260km 남았습니다.’
다음 구간 걷기를 예고하는 글이었다. 곧장 댓글을 적었다.
‘불러만 주세요. 저는 준비됐습니다. 아프면 다녀와서 치료하면 됩니다!’
월간산 2023년10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