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 1회. 설악에 진심인 아재·아줌마들 모였다
41년간 다닌 직장을 정년 1년 남기고 퇴직을 결정한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으나 밤새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늦은 밤 휴대폰으로 이런 저런 기사를 뒤적이던 어느 날 밤, ‘퇴직자 여러분, ‘설악산둘레길’ 개척 대원으로 모십니다‘라는 월간 <산>의 기사 제목이 눈에 번쩍 띄었다.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은 묻는다.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명예퇴직이라니? 아니? 왜? 1년 먼저 퇴직하고 뭐 하려고?”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쉼 없이 바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기에 퇴직 후 얼마간은 여유롭고 느긋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계획 없이 하루하루를 즐길거라고!”
그러나 이런 나의 각오는 설악산 둘레길 개척대원 모집 기사를 보는 순간 여지없이 무너졌다. 가슴이 뛰고 힘이 솟아오르는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신혼여행지인 설악산에서 제2의 인생 첫 출발을 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산이 좋아 블랙야크 100명산을 1년 6개월에 걸쳐 완등하고, 건강을 타고 난 덕인지 나이 환갑이 되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기도 했으니 이 프로그램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경옥고 꺼내먹고 체력테스트 준비
신청 동기를 멋지게 쓰려고 딱 하루 망설이는 동안 신청기한이 무려 한 달이나 남았는데 갑자기 접수 마감 되어버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밤중에 부랴부랴 신청서를 작성하여 메일 전송하고 다음 날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사정사정하여 ‘와일드카드’로 개척단원에 합류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기마감 해프닝은 월간 <산>의 대단한 위력 덕에 신청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란다.
2023년 3월 4일 토요일 홍제역에서 박승기 개척단장과 관계자 5~6명, 개척대원 20여명이 처음 만났다. 간단히 이름 석자 통성명한 후, 개척대원은 박승기 개척단장님으로부터 등고선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고 중간 중간에 숫자가 씌여 있는 지도 한 장을 받아들고 독도법 교육과 시험, 체력 테스트를 받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의 안산을 올랐다.
단장님은 우리들에게 봉우리, 능선과 계곡, 사면, 안부, 건물 표식을 설명하였고 지도에 적혀있는 번호의 위치가 어디인지, 지도에 표시된 길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을 끊임없이 물었다. 처음 듣는 독도법 수업이 어렵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등산 지도를 볼 때마다 궁금하던 ‘안부’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움푹 들어간 부분을 뜻하는 것인지 오늘에야 알았다.
독도법 수업을 마치고 드디어 체력테스트 시간. 설악산 둘레길을 개척할 사람들이 동네 뒷산격인 안산에서 체력테스트를 하다니!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사단법인 다움숲 관계자 2명이 선발대로 먼저 올라가고, 개척대원은 단장님과 테스트 기준 시간을 조율했다. 그동안 나는 배낭 속에서 경옥고 한 봉지를 몰래 꺼내먹고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스틱을 꺼내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가파른 경사를 정해진 시간 내에 도달하는 체력 테스트를 통과! 이 날 참석했던 개척대원 전원 통과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각자 준비해온 점심을 먹었다. 처음 만나 서먹서먹하던 분위기는 안산을 오르고 체력 테스트를 받으며 어느새 화기애애한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가져온 김밥, 주먹밥, 유부초밥, 귤, 바나나, 초코파이 등을 나누며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독도법 익히며 대원들간 ‘마음열기’
안산을 거쳐 무악재 하늘다리를 지나 너른 바위에 앉아 앞으로의 교육 일정을 듣고 또다시 지도를 들고 길찾기를 시작했다. 박승기 개척대장은 특유의 ‘아재 개그’를 끊임없이 쏟아내며 즐겁게 독도법을 교육하였다. 떠들고 웃고 즐기는 사이에 우리는 사단법인 다움숲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파트 빌딩 숲 사이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다움숲에서 바라본 풍경은 처음엔 낯설었다. 하지만 인왕산 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지막한 1층 집들과 그 아래로 흩날리는 벗꽃잎은 서울이라 믿기 어려운 여유와 평화 그 자체였다.
11박12일간 우리가 개척할 길은 해발 800~1000m를 오르내리는 코스이다. 둘레길이라고 부르기에는 고지가 다소 높은 감이 있어 프로젝트로 명명되었던 ‘설악산 둘레길’은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로 수정하였다.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을 개척하기 위한 본격적인 교육이 4월, 3주간 주말을 이용하여 6회 진행되었다. 첫째 날 첫 시간은 ‘마음 열기’ 시간이었다. 민병순 다움숲 대표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개척대원들이 자시 소개를 했다. 세 명 정도 발표를 했으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이름, 지원하게 된 동기와 선발된 후의 기쁨,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뿐이었다.
개척대원 20명이 모두 발표를 해도 내용은 같았을 것이다. 왜? 우리가 서약한 조금은 우스꽝스런, 그러나 엄청 심오한 철학이 담긴 ‘나 때는 말이야는 금물’인 ‘행진 10계명’ 때문이다. 우리가 대화의 주제로 삼지 말아야 할 10가지는 군대시절, 큰 대학, 대기업 취직, 아내와 얘들 재롱, 큰 아파트, 여친 로맨스, 정치권과 연줄, 주식 투자, 종교이며 3회 이상 경고 시 퇴출하기로 서명하였다.
자연 속에서 치유하는 마음으로 너를 향하는 너그러움, 나를 낮추고 우리를 생각하면 긍정의 힘을 얻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진 행~진”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약속이다. ‘마음열기’ 시간에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대표님의 허락으로 서로 진솔하게 알아가는 시간으로 진행 되었다.
나는 취미로 마라톤을 했다. 풀코스 마라톤을 연습할 때면 늘 혼자서 하던 것이 습관이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싶다고 나 자신을 소개했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 족보까지 설명한 이O구님, 자신의 키가 가장 크다며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 도토리 키재기를 하신 이O형님, 코오롱등산학교 1기생 주O호님, 14세 때부터 암벽 등반을 하고 희말라야를 등정한 박O기님, 숲해설가 자격증 소유자 이O진님, 산티아고 순례길을 막 마치고 돌아온 왕언니 문O숙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은 둥치 안O길님 등 평생 열심히 살아온 쟁쟁한 분들과 함께 하게 되어 앞으로 펼쳐질 활동이 더욱 기대 된다.
GPS 앱과 스포츠 테이핑 익히기
둘째 날은 본격적인 독도법 교육으로 ‘산길샘’ 활용을 배웠다. ‘산길샘’은 GPS를 활용한 길 찾기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스마트폰 앱을 활용해 온라인 지도에 그린 후 길 따라 걷기를 함으로써 정해진 루트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오전 이론 교육 마치고 점심 식사 후 인왕산으로 실습을 가려고 하였으나 우리가 가고자 한 인왕산에 산불이 발생하여 순식간에 개미마을 뒷산까지 번지면서 우리는 부랴부랴 긴급 대피했다. 일주일이 지난 4월 8일 토요일, ‘산길샘’ 실습교육으로 인왕산 기차바위를 지나 정상까지 다녀왔다. 가는 길목마다 불에 탄 나무들, 철근 뼈대만 남은 전망대, 아직도 남아있는 연기 냄새가 산불의 처참함을 고스란히 알려주었다.
산이 좋아 개척대원이 된 우리 모두의 가슴이 아프고 시렸다. 인왕산 정상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휴대폰 소리를 듣고 정해진 루트를 벗어났음을 인식하고 오던 길을 되돌려 일행을 찾아 합류하며 다양한 분야에서의 IT 급격한 발전을 실감했다.
11박 12일 활동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등산 식량, 조난 사례 및 극복 방법, 야영, 보행법, 레이어링, LNT원칙, 의류 소재, 등산 문학, 세계 산악 지리 등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생존로프 매듭법을 배운 후 암벽 초보 수준의 확보, 하강, 구조, 트레버스 등의 실습도 했다.
10여 일간 매일 20km씩 이어질 장거리 산행 부상 방지책으로 스포츠테이핑 교육이 조별 실습으로 이루어졌다. 부상 빈도가 높은 발목, 무릎, 족저근막, 등, 어깨 등을 서로서로 역할을 바꾸어가며 테이핑하며 소감을 나누며 테이핑 위치, 강도 등 올바른 방법을 익혀나갔다.
독수리5형제와 건달들
설악산 라운드 트레일 개척은 이미 있는 산길과 임도, 작은 소로를 포함한다. 산길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산길을 찾아 이어주는 활동이다. 18명의 개척대원은 4조로 나누어 활동하며 각 조원은 규율대장, 길찾기, 사진 촬영, 활동 기록, 보급 등 자신에게 적합한 활동을 맡았다. 4개의 조가 돌아가며 선두를 맡아 길찾기 활동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어 팀원 간의 화합이 매우 중요하다. 팀원 간에 협동을 다지는 ‘팀 빌딩’ 활동을 마지막 날에 진행했다.
팀 이름 짓기, 팀 구호, 팀가, 역할 분담 활동을 마치고 발표 시간도 가졌다. 팀 이름으로는 독수리5형제, 설악산, 모지리(모조리, 모두, 함께), 건달들(평생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조금 놀아보자는 뜻)로 정했다.
사전교육의 하이라이트 발대식이 마지막 순서로 진행되었다. 가장 연장자 문O숙, 이O진 님의 선서가 이어졌다. 선서 내용이 참 좋았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깝다. 이어 개척단 단장님과 개척대장님 말씀이 있었고, 두 차례의 앵콜을 받은 걸그룹(대표님의 귀여운 막내딸 안O율)의 축하공연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당당하고 멋진 축하공연을 본 우리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걸그룹에게 보내는 우렁찬 박수는 교육을 받느라 애쓴 우리에게 보내는 칭찬의 박수이자, 앞으로 다가올 11박12일의 고난의 여정을 잘 견디어내라는 격려의 박수이기도 했다.
발대식을 마치고 개척대원 김O희님과 개미마을 언덕을 내려와 홍제동 유진상가를 가로지르며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에 기대와 설레임, 걱정이 함께 담겼다.
설악산 국립공원 밖 둘레를 잇는 걷기길 200km를 연결하는 작업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11박 12일의 여정의 끝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퇴직의 두려움에서 제2의 인생 설계를 위한 자존감 충만한 한 인간으로 우뚝 선 나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