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내륙 종단 트레일

by 단장 posted Oct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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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사 : The JoongAng Plus (2023.11.07)

아스팔트 싫다, 옛길로 걷자 ... 설악~다대포 800Km 잇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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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마을회관 앞, 등산 스틱과 나무 지팡이를 든 여덟 명의 트레커가 백운산(892m) 자락을 등지고 ‘스틱 체조’를 하고 있었다.
차림새와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 강원도 설악산에서 시작해 부산시 다대포까지 ‘중부내륙종단트레일 800㎞’ 길을 만드는 사람들. 사단법인 다움숲의 민병순(53) 대표와 박승기(67) 개척단장, 그리고 남녀 참가자 6명으로 꾸려졌다.

트레일 개척은 지난봄부터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됐고, 이번 개척단은 4기 멤버로, 참가자는 모두 60대였다.
길을 만드는 작업은 산림청 후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는데, 그래서 참가 자격을 은퇴자 또는 명퇴자로 한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회적 걷기’ 모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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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종단트레일 길을 내는 사람들. 지난달 31일 울산 내와마을 숲길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설악에서 다대포까지 트레일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오솔길과 산허리를 가르는 임도(林道), 그리고 강과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난 수변을 잇는다.
‘길이 아닌 곳’을 뚫거나 새로 내는 것이 아닌, 옛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잇는 작업이다. GPS를 통해 선을 그은 후, 한차례 답사를 거쳐 직접 걸어보고, 보통의 체력을 가진 사람이 걷기에 적합한지 검증하는 수순이다. 일부 구간은 앞서 각 지자체가 조성한 둘레길과 겹치기도 한다.

“백두대간(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큰 산줄기)을 걷고 싶은 이들은 많지만, 길이 험해서 실제로 걷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또 학생들이 도전하는 국토종단 길은 다 아스팔트라 다리에 부담을 줍니다. 우리 산하에 걷기 좋은 옛길이 많은데, 그걸 두고 힘들고 어려운 산길·아스팔트길을 가는 게 안타까워 쉬운 국토종단 길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트레일을 설계한 박승기 단장이 말했다.


20년 전부터 트레일 개척

박승기 단장은 한국 산악계에서 기인(畸人)이자 만물박사로 통한다.
1980년대엔 산에 미친 산악인이었다. ‘77에베레스트원정’과 맞먹는 규모였던 86년 ‘K2(8611m) 원정대’의 멤버로 수송을 담당했다. 당시 10t 가까운 짐을 화물선에 실어 파키스탄 카라치까지 운반했으며, 이를 5300m K2 베이스캠프까지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보통 꼼꼼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서 80년엔 76일간 부산 금정산에서 태백산맥까지 일시 종주하기도 했다. 백두대간이란 말이 대중적으로 쓰이기 훨씬 전이다. 또 코오롱등산학교 창립 멤버로 20여 년간 독도법을 강의했으며, 지도에서 위도와 경도를 잴 수 있는 특수한 자를 만들어 ‘승기 자’로 이름 붙이고 특허 출원했다. 또 지금 북한산 둘레길의 모태가 된 ‘북한산 라운드 트레일’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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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기 중부내륙종단트레일 개척단장. 김영주 기자

무엇보다 그는 20년 전부터 일반인에게 생소한 트레일(Trail)을 소개하며, “산행의 개념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해야 한다([사람 사람] 국내 트레일 코스 개발하는 박승기씨, 본지 2004년 5월 5일 자)”고 설파했다.
 
당시 “향후 산행은 산촌을 따라 산길을 지나고 계곡을 지나며 자연을 감상하는 트레일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20년 전에 ‘둘레길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예상한 셈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산악계는 엄홍길·박영석(2011년 작고) 대장이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 레이스를 펼치던 때다. 그때 “산행은 수직이 아닌 수평 위주가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날 걷기 길은 임도가 주를 이뤘다.
내와마을에서 동쪽으로 백운산과 용암산(558m), 서쪽으로 자리 잡은 천마산(613m)과 아미산(603m) 사이로 난 야트막한 산길이다. 길은 구화사 인근까지는 천주교 둘레길, 영남알프스 둘레길 3코스와 겹쳤다. 그리고 구화사를 지나 아름다운 임도 길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길은 시멘트 포장과 흙길이 번갈아 나타났는데, 늦가을 때마침 떨어진 참나무 단풍이 길을 덮고 있었다. 발끝에 낙엽이 치이는 “쓱쓱” 소리에 맞게 경쾌한 걸음이 계속 됐다. 이들 일행은 걷는 속도도 빠르지 않았다. 산행 앱에 찍히는 평균 속도는 시간당 3㎞로 오르막을 오를 때도 땀이 나지 않는 보폭이었다. 길을 걸으며 확인하고 기록해야 했으므로 빨리 걸을 수 없었고, 하루에 가야 할 길이 약 15㎞였기 때문에 속도를 낼 필요도 없었다.

산행 중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박승기 단장은 트레일 개척단을 구성할 때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걸으면서 하지 말아야 금기(禁忌), ‘행진 십계명’을 정한 것이다. ‘돈·아파트 자랑하지 말고 걷기에만 열중하자’는 수행 지침이다. 전국 각지의 트레커가 만나 여러 날 함께 걷게 되면 혹시 모를 분란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사전에 차단하자는 취지다. 그가 직접 십계명을 작성해 걷기 전에 모든 참가자에게 서약서를 받았다고 한다.

“산에 와서 꼰대 취급받으면 안 되니까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하지 말자는 거죠. 기분 좋게 걷고 있는데, 듣고 싶지 않은 소리 하는 사람들이 어딜 가나 꼭 있잖아요.
정치 얘기, 골프 얘기, 주식·아파트·학벌 자랑, 대기업에 취직해서 잘 나간 얘기, 남편·부인·자식 가족 자랑, 산에서 만난 로맨스, 종교 얘기…. 이런 얘기 하면 경고를 주고, 세 번 경고 맞으면 바로 집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아직 그런 경우는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일상적인 대화 소재를 다 제외하고 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기자가 함께 걸으면서 옆에서 지켜보니, 대화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이 맞는지 의견 나누기, 독특한 나무가 보이면 어떤 수종인지 맞혀보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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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종단트레일 800㎞, 길을 만드는 사람들. 왼쪽부터 '돌쇠' 남궁규씨, 민병순 다음숲 대표, '소금 선생' 안준태씨, 박승기 단장, '지원 담당' 김소희씨, 박홍기씨, 윤경미씨, 'GPS 담당' 이욱형씨. 김영주 기자.

지난달 23일부터 함께 걸어온 4기 멤버들은 자연스럽게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IT 업계에서 수십 년 일한 뒤 정년퇴직한 이욱형(61)씨는 길 찾기 담당이다. 그는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재빨리 모바일을 켜고 ‘산길샘’ 앱에 미리 다운로드 받은 ‘예상 지도’와 현지 사정을 맞춰본 뒤 길을 찾았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했지만, 그의 말이 가장 권위가 있었다. 그간 함께 걸으며 길 찾기 작업을 도맡아 해온 덕분이다. 이씨는 “IT 업계에서 일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60대에도 팔뚝이 무쇠와 같아 ‘돌쇠’로 불리는 남궁규(64)씨는 4년 전 홍천소방서장으로 퇴직했다. 그는 항상 대열의 맨 앞에 서서 길을 열었다. 직접 만들었다는 명아주나무 지팡이로 나뭇가지와 거미줄을 걷고, 길에 놓인 썩은 나무 등 장애물을 치우는 작업을 솔선수범했다. 또 그간 자신이 처리한 산악 사고 사례와 대처법을 알려주며, 걷는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했다. 나무에 대해서도 박식했다. 그는 퇴직 후 홍천에서 농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김소희(61) 씨는 지원 차량 담당이었다.
그는 수일 전 산길을 걷다가 발목을 삐끗해 보호대를 한 상태였다. 더는 걸을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지만 끝까지 종주하고 싶어 스스로 드라이버를 자처했다. 김씨는 “지난여름 태백에서부터 걸었는데, 그때 ‘태백에서 다대포까지 다 함께 가자’고 했다. 멤버들에게 내가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 끝까지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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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시작 전 발목에 테이핑을 해주는 중부내륙종단트레일 참가자들. 김영주 기자

등산·등반 경험이 많은 윤경미(60) 씨와 여행사를 운영하다 지금은 2선으로 물러나 있는 박홍기(65) 씨는 매일 보온병에 따뜻한 차를 담아와 쉬는 시간에 멤버들에게 제공했다. 장거리 하이킹에서 남을 위해 자신의 배낭에 1㎏의 식량·장비를 더 짊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십 수일이라고 한다면 더 그렇다.

안준태(61) 씨는 이 행렬에서 ‘소금 선생’으로 불렸다.
고등학교 기술 교사를 하다 정년을 5년 앞둔 시점에 퇴직한 안씨는 “소금을 통해 건강 관리를 한다”고 말했다. 29년 전 과체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소금 복용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이후 소금 전도사가 됐다. 그는 쉬는 시간마다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에 정제 소금을 타 ‘소금 차’를 만들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멤버에게 소금 차를 대접했다. 일부 멤버는 거절하기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쉬는 시간마다 소금 차를 내왔다. 또 소금 차를 만드는 시간 외엔 묵언 수행에 가까울 정도로 걷기에 열중했다.

기자가 이틀 동안 살펴보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서로의 걷는 방식을 존중했다.
그간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해온 사람들이라는 점, 또 모든 참가자가 오랫동안 산에 다닌 사람들이라서 ‘산에서 지켜야 할 매너’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800㎞ 일시종주 다시 할 것”

첫날 코스는 두서면 내와마을에서 시작해 인보리·구량리를 거쳐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언양읍 대곡리 앞까지 약 15㎞였다. 박승기 단장은 “울산에서도 오지로 치는 외딴 마을을 잇는 임도가 이어지는 아름다운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구간에선 가축 축사와 식품·공업 공장에서 내뿜는 냄새로 악취가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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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임도를 거쳐 욱곡 마을로 내려오는 감나무과수원 길 김영주 기자.

이튿날은 반구대 암각화 안내소에서 한실(대곡리)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 길은 태화강 백리길 2구간과 같은 길로 앱을 켜지 않고 이정표만 보고도 걸을 수 있었다. 언양읍 대곡리에서 범서읍 입암리 선바위까지 약 15㎞가 이어졌다.

둘째 날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한실 마을과 욱곡 마을을 잇는 임도 길이었다. 해발 약 150m에서 시작해 350m 지점까지 오르막이 이어진 뒤 다시 감나무밭이 끝없이 펼쳐진 욱곡 마을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한실 마을에서 만난 한 노인이 일행을 보더니 “만데이” 방향으로 가라고 일렀다.
모두 ‘만데이가 무슨 뜻이지?’하며 어리둥절했는데, 경남 김해 출신인 김소희씨가 “언덕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통역을 해줬다. 만데이는 경상도 사투리로 ‘산마루’를 뜻한다고 한다.
 
정말로 한실 마을 끝자락에서 길이 없어지고, 왼편 산으로 오르는 작은 오솔길이 나왔다.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땔나무를 하러 오르내렸을 작은 길이다. 여기가 만데이 입구였다. 30여분간 오르막이 끝나고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임도가 나타났는데, 위장막을 씌운 현대자동차의 SUV 신차가 출시를 앞두고 차량 테스트를 할 만큼 오지 길이었다. 실제 이날 다른 산행객을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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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종단트레일을 개척하는 사람들. 한실 마을에서 '만데이' 산마루를 오르고 있다. 김영주 기자

욱곡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가려진 분지로 첫날 산행을 시작한 내와 마을만큼이나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따지 않은 감나무가 지천이었다. 마을 어귀,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작고 아담한 카페가 눈에 띄었다. 주인장은 농장 안에 설치한 비닐하우스에서 직접 커피나무를 키워 수확한 콩으로 커피를 내렸다. 산행 후 마시는 한 잔의 드립커피가 진하고 달콤했다.

이날 이후 다대포까지 길은 1주일 남았다. 박승기 단장은 “애초 예정이었던 11월 7일 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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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이날 트레킹 종료 지점인 울주군 선바위 앞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부내륙종단 트레일 참가자들. 김영주 기자

중부내륙종단트레일은 총 네 차례에 걸쳐 약 두 달간 걸어 길을 개척했다.
참여한 인원은 약 30~40명이다. 개척단은 길을 계획할 당시 GPS를 통해 설계한 길과 실제 답사를 통해 확인한 길을 보정해 800㎞ 트레일을 확정할 계획이다. 지자체의 도움 없이 오로지 민간이 나서서 만든 길이다. 그리고 길이 확정되면 다시 한번 논스톱 종주를 할 계획이다.

민병순 다움숲 대표는 “산림청 녹색자금을 지원받아 은퇴자 중심으로 멤버를 꾸려 구간별로 길을 확인하며 걸었다. 트레일을 확정하기까진 약간의 보정이 필요할 것 같다. 향후 여건이 된다면 일시 종주를 다시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2023년11월7일